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먼드 핼리 (문단 편집) === 1684년, 기적의 해 === 16세기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나날이 축적되는 연구와 발전하는 망원경, 관측 도구 덕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있었다. 다만 그걸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에 계산이 안 맞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반박을 하려고 해도 정확하게 들이밀 수 있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증명'''이 없었고, 그로 인해 당시까지 [[천동설]]은 견고한 반석 위에 올려져 요동도 안 했고, 때문에 천동설을 제창하던 일부 천문학자들에게 비난 받아왔다. 다시 말해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를 정확히 계산해 내는 [[아이작 뉴턴|사람]]은 [[미적분|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풀릴 듯 안 풀릴 듯한 이 문제는 당대 학자들에게 있어서 핫이슈였다. 그중에 핼리,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 천문학자이면서 영국 시티 오브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담화 도중에 렌이 재미 삼아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할지£40[* 2015/12/15 한화 약 400만 원] 내기를 건다. 하지만 대략적인 이해와는 별개로 근거가 될 수학적 자료가 전무했기에 누구도 진전이 없었다. 거기에 훅이 자신의 용수철 연구를 통해 공전 문제를 풀 수 있다며 나댄 것도 있고. 1684년 8월 8일 핼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하는데 거기서 같은 왕립협회의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뉴턴]]을 다시 만나게 된다. 뉴턴은 왕립협회에서 안면은 있었으나 13년 가까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유는 13년 전에 뉴턴이 발표한 '빛에 대하여'란 논문에 갑자기 훅이 자기 연구를 도둑질해 갔다며 공식적인 표절 의혹을 제기한 것. 아는 사람들은 노친네 병 도졌네라는 식으로 쳐다 봤지만 왕립협회 고참이 정식으로 제기한 문제를 '''절차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억울한 뉴턴이 토라져 은둔해 버린 것. 거기에 훅이 쓸데없는 인신공격을 해서 뉴턴이 후에 앙심을 품게된 건 덤이고.[* 훅이 작고한 이후 뉴턴이 왕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는데 이때 훅에게 오래전부터 앙심을 품고 있던 뉴턴은 훅의 생전 유일의 공식 초상화를 '''직접''' 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진실에 가까운 전설? 덕에 현존 하는 훅의 초상화는 후에 지인들과 자료에 묘사된 모습으로 그려진 '''추정 초상화'''다.] 물론 근거가 없는 채 끝났지만. 핼리가 추측하기에 만유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문제를 풀면 실마리가 풀리리라고 생각했지만 만족할 만한 계산법이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턴에게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핼리와 뉴턴이 만나기 몇 년 전에 존 플램스티드가 뉴턴과 만나 핼리와 비슷한 요지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플램스티드가 답을 얻지 못한 이유는 대화와 토론만 하고 뉴턴에게 답을 안 물어봐서.] >'지구의 태양 공전 말입니다, 인력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면 어떤 궤도가 나올 거 같습니까? >''''타원'''' >'!!!' 뉴턴에게 어떻게 계산했냐고 물었더니 20년 전에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했다. 핼리는 뉴턴에게 당장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뉴턴이 갑자기 20년 전 자료를 찾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 날 다시 써서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흥분한 핼리는 다음 날이 오길 고대했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훅처럼 또 당했구나 하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때 들리는 편지 배달소리, 그렇게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초본이 핼리의 손에 쥐어졌다. 내용에 충격과 감복받은 핼리는 단숨에 뉴턴에게 달려가 옛 일 일랑 잊고 왕립협회에서 당장 출판하자고 했다. 뉴턴을 설득한 다음 단숨에 왕립협회에 보고한 다음, 협회에서 당장이라도 출판하자는 회답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답은... >돈이 없어... 그랬다. 진짜로 돈이 없었다. 매해 왕립협회에서는 각계에서 지원 받는 운영금을 출판을 통해 벌어 학회를 꾸려 왔다. 거기서 남는 이윤은 왕립협회 직원의 봉급으로도 사용되었고. 1684년 왕립협회에서는 그해 야심차게 준비한 책 '물고기의 역사 De Historia Piscium/History of Fish' 출판에 1년치 운영금을 몽땅 부어 넣었다. ||[[파일:external/www.christies.com/d5062681l.jpg|width=300]]||[[파일:external/www.lynge.com/28408e.jpg|width=300]]|| ||[[파일:external/www.ub.uni-heidelberg.de/II_17.jpg|width=300]]||[[파일:external/www.lib.utah.edu/QL41-R6-ED.jpg|width=300]]|| ||<-2> 당시 출판된 책의 일부 || 그런데 이놈의 책이 안 팔린 걸 넘어서 왕립협회의 운영까지 흔들게 된 것. 그러다 보니 이 위대한 발견을 당장 출판할 길이 없게 됐다.[* 결정적 이유로, 보면 알겠지만 대중서를 지향했어야 하는데 전부 [[라틴어]]로 쓰여있다.] 결국 핼리의 계속되는 설득에 3년 뒤인 7월 5일 1687년에 우여곡절 끝에 뉴턴을 도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고 당시 협회 직원이던 핼리에게 전해진 왕립협회발 편지 한 장. >논문 출판 축하 드립니다. >앞으로 '핼리' 씨 1년치 봉급£50[* 2015/12/15 한화 약 500만 원.]은, >'물고기의 역사' 책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 >왕실협회 드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